관중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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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중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재상으로, 뛰어난 정치, 경제 개혁을 통해 제 환공을 춘추 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공자 규와 소백의 왕위 다툼에서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관중은 행정 개혁, 경제 개혁, 그리고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한 목민 사상을 통해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 공자는 그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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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 (춘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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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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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이오 (夷吾) |
직업 | 정치가, 철학자 |
주요 저서 | 관자 |
한자 | 管仲 |
병음 | Guǎn Zhòng |
웨이드-자일스 | Kuan³ Chung⁴ |
한국어 발음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Guan Jung |
광동어 발음 | Gun² Zung⁶ |
월병 | Gún Juhng |
민난어 발음 | Kńg Tiōng |
고대 중국어 발음 | *[k]ˤo[n]ʔ N-truŋ-s |
자 | 중(仲) |
시호 | 관경중(管敬仲) |
생애 | |
출생 | 기원전 720년경 |
출생지 | 안후이성푸양시잉상현 |
사망 | 기원전 645년 (75세) |
사망지 | 산둥성 |
정치 활동 | |
섬긴 군주 | 공자 규 → 환공 |
직책 | 재상 |
주요 업적 | 부국강병 |
철학 사상 | |
학파 | 법가, 도가 |
영향 | 자기 이후의 동양 철학 전체 |
2. 생애
기원전 725년 제나라 영상(현재 안휘성 복양시 영상현)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포숙과 함께 지내며 관포지교 고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제나라 공자들의 후계 다툼에서 제 환공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으나, 포숙의 천거로 제나라 재상이 되었다.
기원전 686년, 관중이 제 환공에게 중용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는 주 왕실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제후국들이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던 시기였다. 관중은 제 환공을 도와 제나라의 국력을 크게 키웠다.
기원전 681년,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화의 과정에서 노나라 장수 조말이 제 환공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관중은 제 환공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설득하여 노나라 영토를 돌려주게 했다. 이 일로 제 환공의 명성은 중원에 널리 퍼졌다.
기원전 679년, 제 환공은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覇者)의 지위에 올랐다.
기원전 645년에 사망하였으며, 제 환공은 관중에게 "중부"(仲父중국어)라는 존칭과 “경(敬)”이라는 시호를 내려, 이후 '''관경중(管敬仲)''', 또는 '''관자(管子)'''라고도 불린다.[18] 관중 사후, 제 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삼귀(三貴)'라 불리는 세 명의 간신 (공자개방, 역아, 수조)을 가까이 하였다.
이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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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개방 | 위(衛) 의공 또는 대공의 아들로, 모국을 배반하고 제 환공에게 영합하였다. |
역아 | 요리사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들을 죽여 육편으로 만들어 환공에게 바치는 등 인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 |
수조 | 자궁한 환관으로, 제 환공에게 영합하였다. |
기원전 644년, 환공이 병으로 눕자 삼귀는 후계자를 폐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기원전 645년 환공 사후, 제나라는 후계자 쟁탈전으로 내란이 일어났고, 이 혼란 속에서 환공의 시신은 67일 동안 방치되었다. 결국 공자소가 효공으로 즉위하였으나, 내란으로 인해 제나라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어 춘추시대의 패권은 진의 문공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2. 1. 청년기
관중은 기원전 725년 제나라 영상(현재 안휘성 복양시 영상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상은 영수 근처에 위치한 상업의 중심지로, 수운을 통해 교류하기 쉬운 곳이었다. 경제를 중요시했던 관중의 사상은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관중은 관숙선(管叔鮮) 또는 무왕(穆王)의 후손으로 여겨진다.[5][6]젊은 시절 관중은 포숙과 함께 지냈으며, 훗날 관포지교로 불리는 우정을 쌓았다. 다만 이 내용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출신지인 영상의 특성과 관포지교의 내용 중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관중과 포숙은 각각 제나라의 공자인 규와 소백을 모셨다. 제 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로 향했다. 중간에 관중이 소백을 죽이기 위해 화살을 쏘았지만, 소백은 허리띠에 있는 쇠고리에 화살을 맞았을 뿐 멀쩡했다.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들어와 고혜와 국씨의 도움으로 제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환공이다.
2. 1. 1. 관포지교
포숙과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낸 관중의 이야기는 〈사기〉의 '관안열전'에 실려있으며,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21]관중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포숙과의 깊은 우정을 쌓았다. 관중은 포숙과 함께 장사하며 이익을 더 많이 차지했지만, 포숙은 관중의 가난을 이해하고 그를 탐욕스럽다 여기지 않았다. 관중이 포숙을 위해 벌인 일이 실패로 돌아가도, 포숙은 시운의 변화를 알기에 관중을 어리석다 비난하지 않았다. 관중이 벼슬에서 세 번 쫓겨나고 전쟁에서 세 번 도망쳤을 때도, 포숙은 관중의 능력과 상황을 이해하고 그를 믿었다. 공자 규가 패하고 관중이 굴욕을 당했을 때도, 포숙은 관중의 큰 뜻을 알고 그를 변함없이 지지했다.[21]
관중은 자신을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이라고 말하며 그의 깊은 우정에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관중과 포숙의 깊은 우정은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지고 있다.
2. 2. 공자 규와 소백의 후계자 다툼
제 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 자리가 비게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제나라 공자인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로 향했다.[1] 중간에 관중이 소백을 죽이기 위해 배에 화살을 쏘았으나, 소백은 허리띠에 있는 쇠고리에 화살을 맞았을 뿐 멀쩡했다.[1] 소백은 죽은 척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관중은 소백이 죽었다고 착각했다.[1]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들어와 고혜와 국씨의 도움으로 제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환공이다.[1] 관중이 모시던 규는 죽임을 당하고, 관중은 포숙의 천거로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1]
기원전 686년, 제 양공이 살해당하고, 공손무지가 새로운 군주가 되자, 규와 소백은 각자의 스승과 함께 도망쳤다.[2] 규는 노나라로, 소백은 주나라로 피신했다.[2]
당시 군주였던 제 양공은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후계자 다툼의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공자들은 나라 안에 머물러 있으면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3] 그래서 관중은 공자 규와 함께 노나라로 도망쳤고, 포숙과 소백도 거(莒)로 피신했다.[3] 그 후, 제 양공은 사촌인 공손무지(公孫無知)의 반란으로 살해되었지만, 공손무지 또한 군사들에게 토벌당하여 군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3] 제나라 안에서는 규와 소백 중 누가 새로운 군주가 되어야 하는지 여론이 분열되었고, 먼저 귀국하는 쪽이 유리한 상황이었다.[3]
이때 관중은 공자 규의 귀국을 재촉하는 한편, 경쟁자인 소백을 암살하려 했다.[3] 관중은 덤불 속에서 독을 바른 화살을 쏘아 수레 위에 있던 소백의 배에 명중시켰으나, 화살은 허리띠 고리에 맞아 몸에 닿지 않았고 소백은 무사했다.[3] 소백은 죽은 척하고 수레를 달려 그 자리를 급히 벗어나 공격을 피했다.[3] 관중은 소백이 죽었다고 착각했고, 공자 규 일행은 유유히 제나라로 귀국했다.[3] 그러나 이미 제나라에 들어와 있던 소백과 그의 신하들은 이미 국내를 장악하고 있었고, 관중과 공자 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노나라로 퇴각했다.[3]
제후가 된 소백, 즉 제 환공은 후일의 화근이 될 규를 치기 위해 군대를 노나라로 향하게 했다.[3] 노나라는 항전했지만, 제나라 군대가 강력하여 궁지에 몰렸다.[3] 제 환공은 군대를 철수하는 대신, 공자 규의 처단과 관중 및 소흘(召忽)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3] 노나라는 이에 응했고, 공자 규는 참수되었으며, 관중은 죄인으로 제나라로 압송되었고, 소흘은 자결했다.[3] 그러나 관중은 제나라에 들어가자 구금이 풀렸다.[3] 포숙이 “폐하께서 제나라만을 다스리신다면 저와 고계 두 사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권을 원하신다면 관중을 재상으로 삼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3]
2. 3. 제나라 재상 등용
기원전 686년, 기상공(齊襄公)이 궁정 쿠데타로 살해당하고 공손무지(公子無知)가 새로운 군주가 되었으나, 이듬해 공손무지 역시 살해당했다. 이에 제나라 신하들은 주나라로 피신해 있던 공자 소백(小白, 훗날의 제 환공)을 옹립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노나라는 소백의 이복형제인 공자 규(糾)를 제나라 군주로 세우려 했고, 규의 스승이었던 관중은 소백의 귀환을 막기 위해 그를 요격했다. 이 과정에서 관중은 소백에게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은 허리띠 버클에 맞았다. 소백은 죽은 척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제나라로 돌아가 군주(제 환공)가 되었다.[1]제 환공은 본래 관중을 죽이려 했으나, 포숙은 관중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할 것을 강력히 천거했다. 포숙은 "관중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를 재상으로 삼으시면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지위가 관중보다 낮아지는 것을 감수했다. 결국 환공은 포숙의 의견을 받아들여 관중을 재상에 임명했다.[1]
포숙의 천거로 재상이 된 관중은 제 환공에게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강병(强兵) 이전에 국가 부유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민생 안정과 규율 확립이 필수적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중의 건의에 따라 제 환공은 관중을 재상에 임명하고, 포숙은 관중을 보좌하게 했다.[1]
관중은 내정 개혁에 착수하여 공전제(井田制)를 폐지하고, 제나라 영토를 21향으로 나누었다. 또한 염업(鹽業)과 어업(漁業)을 장려하여 경제를 활성화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더불어, 다섯 집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상호 감시 의무를 부여하고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엄벌하는 정책을 통해 사회 기강을 확립하고 세수를 확보했다.[1]
이러한 관중의 정책은 제나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고, 제 환공은 이를 바탕으로 패자(覇者)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4. 사망
관중은 기원전 645년에 사망하였다. 제환공은 관중의 공을 인정하여 "중부"(仲父중국어)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고, “경(敬)”이라는 시호를 내려, 이후 '''관경중(管敬仲)''', 또는 '''관자(管子)'''라고도 불린다.[18]관중이 죽은 후,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세 명의 간신 (공자개방, 역아, 수조)을 가까이 하였다. 이들을 '삼귀(三貴)'라고 부른다. 관중이 생전에 경계했던 대로,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다.[18]
이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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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개방 | 위(衛)의 懿공 또는 대공의 아들로, 모국을 배반하고 제환공에게 영합하였다. |
역아 | 요리사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들을 죽여 육편으로 만들어 환공에게 바치는 등 인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 |
수조 | 자궁한 환관으로, 제환공에게 영합하였다. |
관중은 제나라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혼란스러웠던 제나라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20]
기원전 644년, 환공이 병으로 눕자, 삼귀는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공자소를 폐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듬해 환공이 사망하고, 제나라에서는 격렬한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져 내란으로 이어졌다. 이 혼란 속에서 환공의 시신은 67일 동안 방치되었고, 부패하여 구더기가 들끓었다. 결국, 생전 관중의 노력과 패자 환공의 유언 덕분에 제후들의 지원을 받은 공자소가 효공으로 즉위하였으나, 내란과 삼귀에 의한 중신 살해로 인해 제나라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춘추시대의 패권은 제나라에서 진의 문공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3. 관중의 정치 및 경제 개혁
그는 우선, 3년간의 내전과 찬탈로 인해 국고가 비어있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관중은 제나라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강화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관중은 제후들을 통제하기 위해, 무력보다는 "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나라는 이미 관중의 정책으로 강해졌지만, 모든 제후국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관중은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면 다른 제후국들의 반발을 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예물을 보내 제환공의 명성을 높이고 신뢰를 얻었다. 또한 존왕양이를 바탕으로 한 "예(禮)"를 내세워 명분을 확보하여, 제나라 중심의 질서에 대한 협력을 이끌어냈다.
관중은 정전제를 폐지하고 생산성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해안 국가라는 이점을 살려 어업과 소금 생산을 장려하고, 무역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시장 이용자에게 통행세를 면제하는 것도 그 예시 중 하나이다.[7]
관중은 소금, 철, 산림 자원 등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독점하는 염철 전매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세금이 백성들의 재산을 줄이고 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7] 이러한 정책은 "산과 바다를 관리하다(官山海)"라는 말로 표현되었으며, 국가 재정 확충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소금과 철을 통제하는 국가 독점을 도입한 공로를 관중에게 돌린다.
3. 1. 행정 개혁
관중은 제나라의 행정 시스템을 중앙집권화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수도는 상업과 군사 지역으로 나누어 21개 지역으로 구분했다. 6개 지역은 상인들이 거주하며 무역 수입을 담당했고, 15개 지역은 군대의 핵심인 수행원들이 거주했다. 수도 밖은 30가구를 1개 마을, 10개 마을을 1개 부대, 10개 부대를 1개 지역, 3개 지역을 1개 현, 그리고 현들을 5개 행정구역으로 묶는 체계로 조직되었다. 각 계층에는 관리가 임명되었고, 행정구역 관리들은 매년 환공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7]
관중은 세습 귀족 대신 능력 있는 관료를 등용하여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관료제 정비는 제나라의 통치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3. 2. 경제 개혁
관중은 재상으로 취임한 후 제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쳤다. 우선, 행정 구역을 개편하여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수도를 상업과 군사 지역으로 나누고, 지방은 5개의 행정 구역으로 재편하여 각 계층에 관리를 임명하고 정기적인 보고를 받았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주나라 때부터 시행되어 오던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또한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어업과 소금 생산을 장려하고, 특권을 통해 무역을 활성화했다. 예를 들어 시장 이용자에게 통행세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시행했다.[7]
관중은 조세 수입을 늘리는 대신, 소금, 철, 산림 자원 등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독점하는 염철 전매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세금이 백성들의 재산을 줄이고 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7] 이러한 정책은 "산과 바다를 관리하다(官山海)"라는 말로 표현되었으며, 국가 재정 확충에 크게 기여했다.
관중은 통일된 조세 제도를 만들고, 국가 주도로 소금과 철 생산을 장려했다. 그는 천연자원 독점이 세금 인상보다 백성의 불만을 줄이면서 정부 수입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의 정책에 따라 개인 사업자는 생산물을 정부에 판매하고, 정부는 이를 다시 백성들에게 판매하여 이윤을 남겼다.
이러한 관중의 경제 개혁은 제나라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훗날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3. 2. 1. 형산지모(衡山之謀)
『관자』 제84편에 따르면, 환공은 무기 생산으로 유명한 형산국(衡山國)의 위협을 억제하고자 관중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관중은 관리들에게 형산국에서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이도록 지시했다. 10개월 후, 연, 대(戴), 그리고 진나라까지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급등하자, 형산국의 거의 모든 가구가 농사 대신 무기 제작으로 전환했다.[16]
1년 후, 관중은 관리들에게 조나라에서 쌀을 시가의 세 배가 넘는 가격으로 사들이도록 했다. 막대한 이윤을 보고 형산국은 쌀 재고를 기나라 관리들에게 팔았다. 그 후, 관중은 갑자기 기나라 군대가 형산국을 침공하도록 명령했다. 무기와 쌀을 모두 팔아넘긴 형산국은 곧 항복했다.[16]
일부 역사가들은 기-형산 전쟁을 초기 형태의 경제전으로 보고 있다.[16]
4. 관중의 사상
관중의 사상은 사기(史記) 관안열전과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관자는 관중이 직접 작성한 부분과 후학들이 그의 말을 집대성한 책으로, 엄밀히 말하면 온전히 그가 작성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관중은 행정 개혁으로 인해 법가 사상가로 분류된다.[8] 인디애나 대학교의 R. 에노는 "법가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춘추 시대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재위 기원전 685~643)의 재상이었던 관중의 시대를 그 시작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라고 평가한다.[9]
관중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고,[10] 통치자의 도덕성과 통치 능력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제환공이 사치(사냥과 여자)가 패권에 해를 끼칠지 묻자, 관중은 부적절한 인재 기용과 오용만이 해를 끼칠 것이라고 답했다.[11] 공자는 그의 검소함과 의례 지식 부족을 지적하기도 했다.[12]
그럼에도 관중은 "이상적인 유교 장관"으로 여겨질 수 있다.[13] 그는 제환공에게 "흔들리는 자들을 예의로써 불러들이고, 먼 곳에 있는 자들을 덕으로써 소중히 여겨라. 네 덕과 예의가 흔들리지 않는 한,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제환공이 통치 씨족을 폐위하려 할 때, 관중은 예의(禮, ''li'')와 신뢰(信, ''xin'')로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자의 제자들은 관중의 예의 부족을 비판했지만, 공자는 "관중 덕분에 제환공은 제후들을 모을 수 있었다. ...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옷깃을 왼쪽 위에 여몄을 것이다"라며 그의 업적을 인정했다.[12]
공자 제자들은 관중이 인(仁, 유교적 인간성)을 따랐는지 질문했지만, 전국 시대 이전 "인"은 독특한 공리주의적 정의를 가졌기에, 관중은 "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14] 그는 전국 시대 稷下학궁에서 편찬된 『관자』 백과사전을 편찬했다.
4. 1. 법가 사상
관중은 행정 개혁을 통해 법가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8] 실제 법가 사상은 수백 년 후에 발전했지만, 인디애나 대학교의 R. 에노는 "법가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춘추 시대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재위 기원전 685~643)의 재상이었던 관중의 시대를 그 시작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라고 평가했다.[9]관중은 통치자의 도덕적 순수성과 통치 능력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사냥과 여자를 좋아했던 환공이 이러한 사치가 패권에 해를 끼치는지 묻자, 관중은 통치자의 사치는 패권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부적절한 인재 기용과 오용만이 해를 끼칠 것이라고 답했다.[11]
공자의 제자들은 관중이 예의가 부족하다고 비판했지만, 공자는 그의 야망과 업적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중 덕분에 환공은 전차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러 차례 제후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의 선함이다!... 관중을 신하로 두었기에 환공은 제후들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온 나라에 통일과 질서를 가져다주어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가 옷깃을 오른쪽 위가 아닌 왼쪽 위로 여몄을 것이다." (전통 중국 의복은 일반적으로 왼쪽 위에 오른쪽으로 여민다.)[12]
공자의 제자들은 관중이 인(仁, 유교적 인간성)을 따랐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전국 시대 이전에는 '인'이라는 단어가 독특한 공리주의적 정의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관점에서 보면 관중은 '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14]
4. 2. 유가 사상과의 관계
관중의 사상은 사기(史記) 관안열전과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관자는 관중이 직접 작성한 부분과 후학들이 그의 말을 집대성한 책으로, 엄밀히 말하면 온전히 그가 작성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8] 그는 행정 개혁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법가 사상가로 분류되지만,[8] 인디애나 대학교의 R. 에노는 "만약 법가의 기원을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시작을 춘추 시대 패자 중 첫 번째인 제환공(재위 기원전 685~643)의 수상이었던 관중의 재상 시대에 놓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라고 평가한다.[9]관중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지며,[10] 통치자의 도덕적 순수성을 통치 능력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제환공은 사냥과 여자를 좋아했는데, 관중에게 이러한 사치가 자신의 패권에 해를 끼칠지 물었다. 관중은 통치자의 사치는 패권에 해를 끼치지 않으며, 부적절한 인재 기용과 오용을 통해서만 해를 입을 것이라고 답했다.[11] 한 구절에서는 공자가 그의 검소함과 의례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그를 "평범하다"고 여겼다고 전한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은 적어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이상적인 유교 장관"으로 여겨질 수 있다.[13] 관중은 제환공에게 "'흔들리는 자들을 예의로써 불러들이고, 먼 곳에 있는 자들을 덕으로써 소중히 여겨라. 네 덕과 예의가 흔들리지 않는 한,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고 전해진다. 제환공이 국가의 통치 씨족을 폐위하려 할 때, 관중은 예의(禮, ''li'')와 신뢰(信, ''xin'')를 통해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조언했다.
공자의 제자들은 관중이 예의가 부족하다고 비판했지만, 공자는 그의 야망과 업적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중 덕분에 제환공은 전차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러 차례 제후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의 선함이다!... 관중을 그의 신하로 두었기에 제환공은 제후들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온 나라에 통일과 질서를 가져다주어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가 옷깃을 오른쪽 위에 왼쪽으로 접었을 것이다 (전통 중국 의복은 일반적으로 왼쪽 위에 오른쪽으로 접는다)."[12]
공자의 제자들은 또한 관중이 인(仁, 유교적 인간성)을 따랐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전국 시대 이전에는 "인"이라는 단어가 독특한 공리주의적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보면 관중은 "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14]
4. 3. 유물론적 사상
관중의 사상은 기초적인 유물론적 개념을 갖고 있다. 관자(목민편)에는 "나날의 생활이 즐거워지면 자연히 예의를 분별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만 하면 도덕의식은 저절로 높아진다."라는 구절이 있다.[19] 또 (칠법편)에는 "물질이 풍부하기가 천하에서 제일이 아니면 정신적으로 천하를 이끌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19] 이는 물질적 기초가 뒷받침되어야 사람의 정신, 의식 또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경제적 안정이 사회 질서 유지와 도덕성 함양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4. 4. 목민(牧民) 사상
관중은 유물론적 개념을 바탕으로 백성을 기르는 '목민(牧民)'이라는 정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의 목민도 관중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20]목민의 주요 내용은 "사유(四維)"로 설명할 수 있다. 사유는 예(禮), 의(義), 염(廉), 치(恥)로 각각 예절, 의로움, 청렴함,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관중은 사유가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을 때 지켜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경제적, 물질적 조건만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하면, 흉년이나 전쟁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백성을 제어할 명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관중은 목민의 안전장치로써 "제사"를 권장했다.[20]
고대에는 사후세계가 현실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라고 믿었다. 즉, 살아서 농민이었다면 죽어서도 농민이고, 귀족이었다면 죽어서도 귀족인 것이다. 관중은 이러한 "제사", "조상신"의 개념을 활용하여, 후손들이 자신의 신분이나 직업을 지키지 않으면 조상신들이 사후세계에서 고생을 하게 되고, 이는 곧 후손들에게 화로 돌아온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20]
현대의 시각에서는 폐쇄적이고 잔인한 사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 백성의 대우가 매우 낮았던 시절임을 고려해야 한다. 관중의 목민 사상은 비록 정치 체제의 안정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백성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20]
5. 평가와 영향
관중의 정치철학은 사후에도 제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활용되어, 제나라가 전국시대까지 강국으로 남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도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8][9]
공자는 논어 헌문편에서 관중을 인(仁)하지 못하다고 평가했지만, 존왕양이를 통해 화하족 문명권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았다.[12]
관중은 제나라 재상 시절, 정치적으로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행정 단위를 개편하여 징세를 실시했다. 또한 전문 관료제를 도입하고, 정부 재정 충당을 위해 "여시"를 만들었다.[8]
『좌전』에 따르면, 관중은 제환공에게 형나라 공격을 촉구하고, 제후의 아들이 아버지를 몰아내는 것을 돕지 말라고 조언했다. 제환공은 관중의 조언을 받아들여 패자이자 제후 연맹의 지도자가 되었다.[1][15] 제환공은 관중에게 "중부"(仲父중국어)라는 칭호를 수여했는데, 이는 훗날 여불위가 진시황에게 수여한 칭호와 같다.
5. 1. 긍정적 평가
제자백가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상은 법가를 비롯한 여러 학파에 영향을 미쳤다.[8][9] 사기 관안열전과 관자를 통해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관자》는 관중이 직접 작성한 부분과 후학들이 그의 말을 집대성한 책으로, 제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활용되어 제나라가 전국시대까지 강국으로 남는 원동력이 되었다.공자는 논어 헌문편에서 관중이 인(仁)하지 못하다고 평가했지만, 동시에 그가 아니었다면 오랑캐로부터 주나라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관중의 존왕양이가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화하족 문명권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2]
사마천은 사기에서 관중을 존경했던 안영과 동등하게 놓았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재능을 관중과 소하에 비유했고, 제갈량 또한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다고 기록했다.
5. 2. 부정적 평가
관중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진다.[10] 그는 통치자의 도덕적 순수성을 통치 능력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사냥과 여자를 좋아했던 환공은 관중에게 이러한 사치가 그의 패권에 해를 끼칠지 물었고, 관중은 통치자의 사치는 그의 패권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부적절한 인재 기용과 인재 오용을 통해서만 해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11]공자는 『논어』에서 관중이 환공과 동등한 격식을 취하거나 생활이 호화로웠다고 비난했다.[12] 공자의 제자들은 관중이 예의가 부족하다고 비판했지만, 공자는 그의 야망과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검소함과 의례에 대한 지식 부족을 들어 "평범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2]
5. 3. 현대적 의의
관중의 사상과 정책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그의 리더십과 개혁 정신은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 특히, 경제 발전, 국가 안보, 국민 복지 증진을 위한 관중의 노력은 현대 한국 사회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관중은 제나라 재상으로 재임하면서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정치적으로는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행정 책임을 세습 귀족에서 전문 관료로 이전하여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경제적으로는 마을 단위로 징세 제도를 개편하고, 정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최초의 공식적인 정부 후원 매음굴인 "여시"를 만들기도 했다.[8] 이러한 관중의 개혁은 제나라를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으며, 제후 연맹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했다.[1]
관중의 정책은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통치자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적절한 인재 기용과 오용을 경계했다.[11] 또한, 예의와 신뢰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추구했다.
공자는 관중을 "인(仁)"하지 않다고 평가하면서도, 그가 아니었다면 주나라가 오랑캐로부터 멸망했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그의 업적을 인정했다.[12] 이는 관중의 정책이 비록 유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관중의 사상과 정책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의 리더십과 개혁 정신은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특히, 경제 발전, 국가 안보, 국민 복지 증진을 위한 그의 노력은 현대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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